FeverStory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

3화

아침은 어둡게 시작됐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낮고 무거웠다. 장마전선이 밤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뿐, 물러간 게 아니었다. 골목길 바닥은 젖어 있었고, 처마 밑에서는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윤하늘은 서점 셔터를 올렸다.

철제 셔터가 덜컹거리며 올라가는 소리가 빈 골목에 울렸다. 안에서는 어젯밤 채 마르지 않은 습기 냄새가 밀려 나왔다. 바닥 구석에 놓아둔 제습기가 밤새 돌아갔지만, 공기는 여전히 눅눅했다.

지하창고 입구 앞에는 양동이 두 개와 걸레, 어젯밤 쓰고 말리지 못한 방수 테이프가 놓여 있었다. 하늘은 그것들을 잠시 내려다봤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서지헌이었다. 손에는 철물점에서 산 듯한 방수용 실리콘 두 통과 새 밸브 손잡이를 들고 있었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고, 와이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린 차림이었다.

그는 하늘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침 일찍 구했습니다. 밸브는 호환되는 규격으로.”

“……네.”

하늘은 짧게 답하고 공구함을 열었다.

둘 사이에 말은 없었다. 어젯밤 이 좁은 공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았는지—서로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합의처럼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하늘은 렌치와 드라이버를 챙겼다. 서지헌은 묵묵히 실리콘 건을 손에 들었다. 공구 챙기는 소리만이 창고 앞 통로에 가볍게 부딪혔다.

그렇게 십 분이 지났을까.

서지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하늘은 대답 대신 공구함을 들고 일어섰다.

지하창고는 어젯밤보다 조용했다.

물은 빠졌지만 바닥은 여전히 축축했고, 벽을 따라 흰 소금기가 길게 번져 있었다. 습기가 빠져나가지 못해 공기는 후텁지근했다. 천장 형광등은 어젯밤 꺼진 그대로였다.

서지헌이 벽 쪽 스위치를 두어 번 눌러봤지만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안정기를 교체해야 합니다. 지금은 손전등으로 하겠습니다.”

그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선반 위에 걸쳐 놓았다. 좁은 공간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반쯤 밝혀졌다.

하늘은 벽면을 살폈다. 수도 배관이 벽을 통과하는 지점, 그리고 환기구 아래 콘크리트 접합부—어젯밤 그들이 급하게 틀어막았던 두 군데가 검은 테이프 자국을 남긴 채 드러나 있었다.

“배관 쪽부터 하겠습니다.”

하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서지헌은 실리콘 건을 그녀에게 건넸다.

하늘은 벽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균열은 생각보다 깊었다. 겉으로 보이는 틈은 좁았지만, 오래된 콘크리트 안쪽으로 가느다란 실금이 여러 갈래 뻗어 있었다.

그녀는 실리콘 건의 노즐을 균열에 맞추고 천천히 밀었다. 흰 실리콘이 틈을 따라 길게 채워졌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서지헌은 그녀 옆에 앉아 환기구 쪽 균열을 메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팔꿈치가 거의 닿을 듯한 거리였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만, 작업은 자연스럽게 분담되었다. 하늘이 위쪽, 지헌이 아래쪽. 마치 오래 전에 익혀둔 동작처럼.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창고 안에는 실리콘 노즐이 벽을 긁는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하늘이 일어서서 배관 위쪽,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지점의 실금을 메우려 팔을 뻗었다.

실리콘 건이 무거워 손목이 떨렸다. 팔을 더 뻗자 어깨 근육이 당겼다. 실금이 길었다. 노즐을 따라 손을 밀던 중—.

손이 미끄러졌다.

실리콘 건이 떨어졌다. 하늘이 균형을 잃고 옆으로 기울었다.

찰나.

손목에 단단한 압력이 감겼다.

“조심하십시오.”

서지헌의 손이었다. 손가락이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힘은 강하지 않았지만 정확했다. 놓치지 않으려는 듯.

따스했다.

하늘의 동작이 멎었다. 서지헌도 멈췄다.

순간, 두 사람 사이로 시간이 꺾이는 듯했다.

열여섯, 혹은 열일곱의 여름. 도서관 사다리 위에서 책을 꺼내려다 발을 헛디뎠던 순간.

계단 아래에 서 있던 누군가가 똑같이 손목을 붙잡았다. 그때도 이런 온도였다. 딱 이 온도. 놓지도, 세게 쥐지도 않은.

“……괜찮습니다.”

하늘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그녀가 손목을 뺐다. 짧고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서지헌의 손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천천히 내려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은 무심했지만, 손을 거두는 속도가 평소보다 느렸다.

하늘은 떨어진 실리콘 건을 집어 들었다. 왼손 엄지가 검지 손톱을 짧게 눌렀다. 한 번. 그리고는 곧 멈췄다.

“계속하겠습니다.”

그녀가 다시 벽을 향했다.

서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이후, 둘 사이에 놓인 침묵의 온도가 바뀌었다. 더 깊고, 더 무거운 침묵. 서로를 보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듯한 긴장감이 좁은 공간을 메웠다.

작업 속도는 더 빨라졌다.

하늘은 배관 주변의 남은 균열을 재빨리 메웠다. 서지헌은 환기구 아래 부분을 마무리하고, 어젯밤 임시로 붙였던 방수 테이프 자리를 실리콘으로 덧발랐다.

묵묵히, 빠르게.

두 사람은 더 이상 손이 닿을 만큼 가까이 가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서지헌이 실리콘 건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벽을 따라 실리콘이 채워진 자리는 매끄럽게 마감되어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만한 상태였다.

“여기는 끝났습니다.”

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균열 한 군데를 더 메우고 나서야 손을 멈췄다. 이마에 얇게 땀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를 닦고 천천히 일어섰다.

서지헌이 공구를 정리하는 동안, 하늘은 창고를 한 바퀴 둘러봤다. 바닥의 물은 완전히 말랐지만, 상자들 아래쪽은 여전히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벽 한쪽에 세워둔 나무 상자—어젯밤 그녀가 포장지를 발견했던 상자—는 서지헌이 더 높은 선반으로 옮겨 놓은 상태였다.

그 상자를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는 시선을 거뒀다.

하늘은 공구함을 닫고 허리를 폈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변호사님.”

서지헌이 고개를 돌렸다.

하늘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플래시 불빛 아래 윤기 나게 빛났다.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서점 일은 제가 합니다.”

잠시 멈추고, 숨을 골랐다.

“변호사님은 서류만 도와주세요.”

서지헌의 손이 잠시 멈췄다. 공구를 놓던 동작이었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무심했다. 입술이 미세하게 열렸다가 닫혔다. 뭔가 말하려던 것 같았다.

그는 한 박자를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짧은 말이었다. 반박도, 변명도, 감정의 호소도 없었다. 그저 존댓말로, 정확히 그 말만.

하늘은 잠시 그를 더 바라보다가 공구함을 들었다.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그녀가 계단을 향해 돌아섰다. 발소리가 콘크리트 계단을 한 걸음씩 밟고 올라갔다.

서지헌은 곧바로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작업용 장갑을 벗어 접고, 남은 실리콘 통을 정리했다. 손전등으로 벽면을 한 번 더 훑었다. 실리콘이 제대로 메워졌는지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아주 낮게 읊조렸다.

“……알겠습니다, 윤하늘 씨.”

1층으로 올라오자 빗소리가 다시 들렸다.

장맛비가 다시 굵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창문 밖으로 회색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비는 오전에 잠시 소강상태였을 뿐, 물러간 게 아니었다.

하늘은 카운터에 공구함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했다.

손목에 남은 감각은 이미 사라졌다. 그러나 그 감각이 있던 자리를 의식하는 일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털고 서점 입구로 걸어갔다. 바람을 쐴 생각이었다.

문을 열자 눅눅한 바람이 얼굴에 달라붙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평소에도 한적한 거리였지만, 오늘은 특히 더 조용했다. 장마 탓인지, 재개발 소문 탓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늘은 계단에 서서 거리를 가로지르는 바람을 맞았다.

그때였다.

길 건너편 가로등 기둥에 무언가 붙어 있었다. A4 크기의 종이 한 장. 비닐 코팅이 되어 있었다. 이 거리에서는 보기 드문, 관공서에서 붙이는 형식의 공고문이었다.

하늘의 시선이 그 종이에 멈췄다.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발걸음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빗방울이 비닐 코팅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손을 뻗어 빗물을 닦아냈다.

재개발 정비계획 수립을 위한 주민 공청회 개최 공고

글자가 선명했다. 일시. 장소.

안건. 참석 대상. 발언 신청 방법.

모든 것이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날짜는—오늘부터 정확히 2주.

심장이 천천히, 그러나 무겁게 내려앉았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서점의 존폐가 저 공청회 하나로 결정된다. 삼촌이 평생 지켜온 이 공간이, 그녀가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이, 이제 행정 절차의 테이블 위에 올랐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서지헌이었다. 그는 하늘의 표정을 보자마자 무언가를 직감한 듯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가로등 기둥을 바라봤다.

공고문을 읽는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변호사의 눈이었다. 텍스트를 정보로, 시간을 시한으로 변환하는 눈.

“공청회가 잡혔군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평소보다 더 무거웠다.

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공고문을 가로등에서 떼어냈다. 테이프 자국이 기둥에 남았다.

종이를 접어 손에 쥔 채, 그녀는 돌아서서 서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지헌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늘은 공고문을 카운터 위에 펼쳐 놓았다.

빗물이 약간 번졌지만 글씨는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조항 하나하나를 더듬듯 읽어 내려갔다.

서지헌은 그 옆에 서서 말없이 같은 공고문을 읽었다. 그의 시선이 날짜와 법적 근거 조항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이 공고는 의견 제출 기한이 일주일입니다.”

하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후에는 서면 진술서 접수 기간이고, 공청회 당일 발언 등록은 사흘 전에 마감됩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공고문 위에서 멈췄다.

서지헌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이대로 두시면 위험합니다.”

하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낮은 조명 아래에서 만났다. 습기와 빗소리가 서점 안을 채우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숨을 고르는 짧은 텀이 있었지만, 그 말은 또렷했다.

서지헌은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절차적으로, 시간적으로, 이 상황을 넘어가려면 서류 작업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것은 변호사의 몫이라고.

하늘은 공고문을 조심스럽게 접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무겁고 깊은 침묵.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적의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역할을 조용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바깥에서는 장마가 계속되고 있었다. 빗소리가 서점 지붕을 두드렸다.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