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

4화

공청회 공고문은 여전히 카운터 위에 펼쳐져 있었다.

윤하늘은 접었던 종이를 다시 펴서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빗물에 번진 글씨가 형광등 아래에서 희끄무레하게 빛났다.

서지헌은 카운터 건너편에 서서 공고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변호사의 눈이었다. 조항과 기한을 저울질하고, 절차의 틈새를 읽는 눈.

“의견서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다.

“공청회 전에 제출된 서면 의견은 기록으로 남고, 추후 이의 제기나 행정 소송에서 근거 자료가 됩니다.”

윤하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떤 내용으로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비계획에서 이 건물의 보존 가치를 입증하는 객관적 자료. 다른 하나는 공청회 발언 등록 전에 제출할 기초 의견서.”

서지헌은 잠시 말을 멈췄다. 창밖에서 빗방울이 처마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발언 등록은 사흘 전까지입니다. 당일 발언자 명단에 오르지 못하면, 회의장에서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사라집니다.”

윤하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공고문 모서리를 누르고 있었다.

“그 서류들, 제가 준비합니다.”

서지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서점 등기부등본하고 임대차 계약서 같은 건 삼촌이 남긴 서류에 있을 거예요. 찾아서 정리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지가 없었다. 부탁도, 양보도 아니었다. 통보였다.

“변호사님은 그걸 바탕으로 법적 검토만 해주세요.”

서지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공고문에서 윤하늘의 얼굴로 옮겨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겠습니다.”

그의 대답은 짧았다. 더도 덜도 아닌, 정확히 그 말뿐이었다.

윤하늘은 공고문을 다시 접었다. 이번에는 더 작게, 더 단단하게. 그녀가 접은 종이를 카운터 서랍에 넣는 동안, 서지헌은 한 걸음 물러섰다.

빗소리가 다시 공간을 채웠다.

지하 창고로 내려가는 계단은 여전히 눅눅했다.

윤하늘은 계단 중간쯤에서 잠시 멈춰 섰다. 어제 수리한 벽 쪽에서 흙냄새가 올라왔다. 응급 방수는 성공했지만, 근본적인 보수 없이는 다음 폭우를 버티기 어렵다는 걸 그 냄새가 말해주고 있었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어제와 똑같은 불안한 점멸이었다.

윤하늘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선반 아래 쌓인 상자들은 습기를 머금어 골판지가 말랑해져 있었다. 삼촌이 서류를 보관하던 상자는 대개 ‘잡지’나 ‘장부’ 같은 연필 글씨가 적혀 있었지만, 몇몇은 아무 표시도 없었다.

그녀는 ‘99-01 임대’라고 적힌 상자를 찾아 선반 아래쪽을 살폈다. 상자 두 개를 들어 올린 끝에 비로소 그 글씨가 보였다. 그러나 바닥 쪽 골판지는 물기를 빨아들여 축 늘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냈다. 바닥이 찢어질 듯했다.

그때, 상자 옆구리 틈새로 책 한 권이 밀려나왔다.

낡은 문고본이었다. 표지는 바래고, 등뼈에는 금이 가 있었다. 그런데 책날개와 본문 사이로 노르스름한 종잇조각이 삐져나와 있었다. 한 장이 아니었다. 여러 겹으로 접힌 편지지 뭉치가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었다.

윤하늘의 손이 멈췄다.

종이의 색깔과 결이 십 년은 족히 묵은 것이었다. 잉크 자국이 뒷면에 희미하게 비쳤다. 몇 글자였지만, 접힌 상태에서는 읽을 수 없었다.

창고 안은 고요했다. 형광등이 다시 한 번 깜빡이고, 벽 쪽 배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손을 뻗어 편지 뭉치를 뽑아내려다가 멈췄다.

손끝이 약간 떨렸다. 그녀는 손을 거두고, 대신 상자 뚜껑을 덮었다.

편지는 그대로 책갈피 사이에 끼워둔 채.

상자를 들어 올리자 바닥이 살짝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윤하늘은 찢어진 틈으로 손을 받치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저 편지가 누구의 것인지, 왜 거기에 끼워져 있었는지, 지금은 묻지 않기로 했다.

묻는 순간, 다른 것들도 따라올 테니까.

1층에 올라오자마자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하늘 언니!”

강다은이었다. 그녀는 한 손에 접은 우산을 든 채 서점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청바지에 밴드 티셔츠, 낡은 운동화 차림이었다. 콧등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서명운동 시작했는데, 언니 가게에도 한 장 붙여도 돼?”

강다은은 어깨에 멘 에코백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며 말했다.

“앞에 약국이랑 문구점은 이미 받았어. 이번 주 안에 백 명 모으는 게 목표래.”

윤하늘은 상자를 카운터 옆에 내려놓으며 강다은을 돌아봤다.

“서명 용지야?”

“응, 재개발 반대 서명. 공청회 전에 제출하면 심의 자료로 쓸 수 있대.”

강다은은 카운터 위에 용지를 펼쳤다. 이미 스무 명 남짓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그때, 창가 쪽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서지헌이었다. 그는 강다은이 들어올 때부터 조용히 책장 옆에 서 있었다. 이제야 그 존재를 눈치챈 강다은이 어깨를 움찔했다.

“아, 손님이 계셨네요. 죄송합니다.”

강다은은 재빨리 존댓말로 바꾸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서지헌이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서명 용지에 닿았다.

“이 서명운동,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서명부에 주민등록번호나 생년월일 기재가 있어야 합니다.”

강다은의 눈이 커졌다.

“그런 규정이 있어요?”

“행정절차법상 의견 제출의 증빙 자료로 쓰려면 실명 확인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청회 발언자 추천 명단과 별도로 제출하는 편이 낫습니다.”

강다은은 잠시 입을 벌리고 서지헌을 바라봤다. 그러다 말투가 반말로 돌아왔다.

“아, 그러면 이거 지금 양식이 잘못된 거야? 야, 큰일이네. 언니, 이분 누구야?”

윤하늘은 서명 용지의 빈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변호사예요. 서지헌 변호사님.”

“변호사님? 세상에.”

강다은은 눈을 반짝이며 서지헌에게 돌아섰다.

“그럼 이 서류 좀 봐주실 수 있어요? 우리끼리 만든 거라 형식이 맞는지도 몰랐는데.”

서지헌은 윤하늘을 한 번 바라봤다. 질문의 눈빛이 아니라, 확인의 눈빛이었다.

윤하늘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보여드려도 돼요.”

서지헌은 서명 용지를 집어 들었다. 그의 눈이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

“서명란에 생년월일을 추가하고, 서명 취지문에 반대 사유를 구체적으로 적는 게 좋겠습니다. ‘정비계획 수립 반대’보다는 ‘보존 가치가 있는 건축물의 철거 계획 철회 요청’이라고 쓰는 편이 심의 단계에서 더 무게가 실립니다.”

“와, 진짜 변호사님 맞네.”

강다은은 감탄하며 윤하늘을 돌아봤다.

“언니, 이런 분이 도와주시면 우리 서명운동 완전 든든해지는데.”

윤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지헌이 서명 용지를 검토하는 손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고, 조심스럽고, 필요 이상의 힘을 주지 않는 손이었다.

그 손으로 십 년 전에 편지를 썼을까.

그 생각이 순간 스치자 윤하늘은 눈을 돌렸다.

서지헌은 강다은에게 용지를 돌려주며 말했다.

“저도 서명하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법률 검토는 제가 도와드리죠.”

“진짜요? 완전 감사합니다!”

강다은은 얼른 볼펜을 건네며 서명란을 가리켰다.

서지헌이 서명하는 동안 윤하늘은 카운터 옆 상자를 선반 쪽으로 밀어넣었다. 상자 안에는 아직 열지 않은 문고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책날개 사이에는 편지지 뭉치가 끼워져 있었고, 윤하늘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류 작업이 먼저였다.

강다은이 서명 용지를 받아 들고 현관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다음 주에 구청에 제출할 때 다시 올게요. 그때 법률 검토한 거 보여주세요, 서지헌 님— 아, 서지헌 변호사님.”

그녀는 서툰 존댓말에 제풀에 웃으며 우산을 펼쳤다.

“언니, 이 비 언제 그칠지 모르겠다. 그럼 안녕!”

강다은이 문을 닫고 나가자 서점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윤하늘은 선반에 올려둔 상자에 손을 얹었다.

서지헌은 카운터 앞에 서 있었다.

“의견서 초안은 내일까지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필요한 자료는 말씀해주십시오.”

윤하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서랍에서 공청회 공고문을 꺼내 한 번 더 펼쳤다. 서명 용지 위에 남은 빈칸과, 아직 쓰이지 않은 의견서, 그리고 상자 속에 그대로 둔 책 사이의 편지.

그 모든 것이 같은 공기 속에 놓여 있었다.

빗소리는 여전했다. 장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다은이 문을 닫고 나가자 서점 안이 갑자기 넓게 느껴졌다. 그녀가 두고 간 서명 용지가 카운터 한쪽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바깥 거리는 장맛비가 잦아들어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처마 끝에서 물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서지헌은 카운터 옆에 서서 공청회 관련 서류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지만, 시선은 서너 번쯤 윤하늘을 스쳤다.

그녀는 그 시선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대신 카운터 위의 달력을 끌어당겼다. 오늘 날짜에 작은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 그 아래로 일주일이 줄지어 있었다.

“변호사님.”

윤하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서지헌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내일 오전에 구청에 가서 공청회 자료를 열람하려고 합니다.”

그녀는 달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의견서를 쓰려면 어떤 서류가 접수됐는지 먼저 확인해야 하니까.”

서지헌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지 기다리는 듯했다.

윤하늘은 그제야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지헌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업무적으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윤하늘은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라는 선을 긋는 말투였다. 그녀는 기다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표정으로 답할지.

서지헌은 서류에서 손을 완전히 떼고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몇 시에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아홉 시요. 여기서 만나서 같이 가는 게 낫겠죠.”

그녀의 대답은 빨랐다. 미리 정해둔 말처럼.

서지헌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언가를 더 묻고 싶은 듯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가, 이내 다문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짧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말에는 여러 겹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윤하늘은 고개를 끄덕이고 카운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그의 발소리가 입구 쪽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빗소리가 잠깐 커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윤하늘은 카운터 의자에 앉았다.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가 수긍할 줄은 알았다. 아니, 수긍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걸었던 건 그녀였다. ‘업무적으로.’ 그 말이 자신에게도 울타리가 되어 돌아왔다.

바깥 창으로 서지헌의 뒷모습이 잠깐 보였다. 그는 거리를 가로질러 임시 사무소가 있는 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십 년 전 그 거리에서 그렇게 떠나던 날과는 전혀 다른 걸음이었다.

그 생각이 스치자 윤하늘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점 마감을 준비해야 했다. 그녀는 카운터 위에 흩어진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공청회 공고문 사본, 공부서류 양식, 서면 의견서 초안. 하나씩 가지런히 포개어 투명 파일에 끼웠다.

내일 아침 그가 올 거라는 생각은 일부러 멀리 밀어냈다.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 올 거라 믿고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준비는 해둔다. 서점을 지키기 위한 준비만.

파일을 봉투에 넣으려다가 카운터 아래 상자에 손이 닿았다.

아까 강다은이 다녀가기 전에 정리하던 상자였다. 낡은 책들 사이에 끼어 있던 편지 뭉치. 지하 창고에서 올려놓은 그 상자였다.

윤하늘은 상자 뚜껑을 열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들 사이로 편지 봉투의 모서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녀의 손이 잠시 그 위를 맴돌았다. 하나를 집어 들면 다른 것들도 따라 올라올 것이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누구에게서 누구에게로 간 것인지,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손가락이 편지 봉투의 끝에 닿았다.

그 순간, 유리창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가 굵어졌다.

오후 내내 잦아들었던 장마비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서점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윤하늘은 손을 거두었다. 편지는 집어 들지 않았다.

“……나중에.”

혼잣말이 빗소리에 묻혔다. 그녀는 상자 뚜껑을 닫고, 카운터 아래 깊숙이 밀어넣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그것이 아니었다. 편지를 읽는 일은, 그 안에서 어떤 과거를 발견하는 일은, 서점을 지키는 일보다 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윤하늘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급하지 않다. 급하지 않아야 한다.

그녀는 카운터 위로 서류 봉투를 올려놓았다. 내일 구청에서 확인할 자료 목록을 메모지에 적어 봉투 겉면에 붙였다. 연필로 또박또박 쓴 글씨가 봉투 위에 자리 잡았다.

바깥은 어느새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는 더 굵어져 가로등 불빛을 흐릿하게 번지게 했다.

윤하늘은 서점의 불을 하나씩 껐다. 책장 쪽 스탠드, 카운터 위의 작은 조명, 입구 간판의 형광등. 마지막으로 카운터 구석에 켜둔 노란 스탠드만 남았다.

그 불빛 아래서 그녀는 내일 아침을 생각했다.

아홉 시.

그가 올까.

온다면 어떤 얼굴로 서류를 건네고, 어떤 목소리로 의견서를 논할까. 오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윤하늘은 굳은 표정으로 마지막 스탠드의 스위치를 내렸다.

서점 안이 어둠에 잠겼다. 빗소리만이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하게 울렸다.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