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

5화

아침 아홉 시, 서점 안은 비구름 탓에 어두웠다. 윤하늘은 코트를 입고 서류 봉투를 쥔 채 유리문 너머를 보다 시계를 확인했다.

아홉 시 정각. 서지헌이 밀고 들어온 유리문 밖으로 우산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바닥에 번졌다. 짙은 회색 코트 어깨가 비에 젖어 더 어둡게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방금 나왔어요.”

윤하늘은 카운터 위 스탠드를 끄고 계산대 서랍을 잠갔다. 서지헌의 시선이 그녀 손의 서류 봉투에 닿았다.

“구청 가기 전에 서점 앞 가로등 공고문 다시 보겠습니다. 사진과 내용이 같은지.”

“비 오는데 굳이.”

“원본 확인이 중요합니다.”

그가 먼저 문을 열고 나섰다. 윤하늘은 가게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채웠다. 가로등 앞에 선 서지헌은 비닐 코팅된 공고문을 손으로 짚으며 조항을 하나씩 더듬었다.

“의견 제출 기한, 일주일. 발언 등록 마감, 공청회 사흘 전.”

빗물이 그의 손등을 타고 흘렀다. 윤하늘은 반 걸음 물러서서 우산을 받쳐 들었고, 자기 우산인데도 그의 어깨 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기본적인 거예요. 이미 아는 내용이고.”

“현장에서 다시 보면 놓친 조항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공고문에서 손을 뗀 서지헌이 뒤돌아섰고, 우산 기울기를 눈치챈 듯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가 곧바로 돌아섰다.

“출발하죠.”

구청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낡은 상가 거리를 지나 중앙대로로 접어들자 상점들은 대부분 셔터를 내렸다. 약국 유리창에는 '임대 문의'라고 적힌 종이가 빗물에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서지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그녀의 왼쪽 반 발짝 앞을 걸었다.

“공청회 전에 서면 의견을 제출하면 기록으로 남습니다. 공청회 당일 구두 발언과는 별개로 심의 위원들에게 사전 배포되는 자료예요.”

“서명운동 자료랑 같이 내면 되는 건가요.”

“네. 강다은 씨가 취합한 서명부에 의견서를 첨부하는 형태가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빗속에서도 또렷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으려는 선이 분명했다. 윤하늘은 그 선을 느꼈다.

“법적 근거가 확실해야 한다면서요. 어제 그렇게 말했잖아요.”

“준비했습니다.”

서지헌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반으로 접힌 노트 속지에는 빼곡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건축법 시행령에 따른 보존 가치 평가 기준,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의 주민 의견 수렴 절차 조항. 그리고 이 지역 도시계획 조례에서 정비계획 수립 시 포함해야 할 주민 의견 청취 규정.”

메모를 건네는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읽어보시겠습니까.”

“걸으면서요.”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윤하늘은 짧게 웃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나중에 서점에서 볼게요. 지금은 비에 젖어요.”

서지헌은 메모를 접어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구청 정문이 보이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

민원실은 조용한 오전이었다. 십 분쯤 기다리자 번호가 불렸다. 창구 뒤의 공무원은 사십 대 중반의 남자였고, 이름표에는 '도시정비과 김주성'이라고 적혀 있었다.

“재개발 정비계획 공청회 관련해서 왔습니다.”

윤하늘은 서류 봉투를 창구에 올렸다. 김주성은 봉투를 받지 않고 모니터를 쳐다봤다.

“공청회요. 다음 주 화요일 오후 두 시. 마을회관.”

“그건 공고문에 나와 있습니다. 의견서 제출 절차와 서면 진술 접수 기간을 확인하려는 거예요.”

김주성이 처음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공고문에 다 나와 있어요. 다시 확인할 필요 없고.”

“의견 제출 기한이 일주일이라고 되어 있는데, 공휴일이 끼면 기산일이 어떻게 되는지—”

“그건 공고문에 나온 대로예요. 이의 있으면 서면으로 제출하세요.”

윤하늘의 손가락이 봉투 위에서 살짝 굳었다. 숨을 들이쉬려는 순간, 서지헌이 반 발짝 앞으로 나섰다.

“행정절차법 제20조에 따르면, 행정청은 당사자의 신청에 대해 필요한 경우 관련 정보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감정 없는,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낮은 목소리였다.

“공청회 의견서 제출 절차와 서면 진술서 접수 기간은 단순한 일정 안내가 아니라 주민의 권리 행사에 필요한 정보입니다. 구두로 답변하시거나 별도 안내문을 주시면 됩니다.”

김주성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캐비닛을 뒤적이더니 A4 용지 한 장을 꺼냈다.

“여기. 공청회 안내 및 의견 제출 요강.”

윤하늘은 안내문을 받아 봉투 안에 접어넣었다.

“감사합니다.”

김주성은 대꾸 없이 다음 번호를 불렀다. 서지헌은 접수대 옆에서 작은 메모지에 무언가 적고 있었다.

“뭘 적으시는 거예요.”

“담당자 응대 태도. 추후 필요하면 기록으로 제출하려고요.”

윤하늘은 메모지 구석에 적힌 '10:23, 도시정비과 김주성, 정보 제공 의무 관련 소극적 응대'라는 글씨를 보았다. 십 년 전 그가 알던 남자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기록 방식이었다. 당시의 그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이제는 조용히 메모하고 다음 수를 준비한다.

“옛날 같았으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말이 먼저 튀어나왔고, 윤하늘은 곧바로 후회했다. 서지헌은 메모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고, 그녀를 똑바로 보지 않고 민원실 출구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옛날 이야기는, 지금 여기서 하지 않겠습니다.”

빗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서점으로 돌아오는 길은 올 때보다 더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두 사람은 거의 말없이 걸었다. 우산 하나에 나란히 서기에는 빗방울이 너무 컸고, 윤하늘은 한 발짝 물러서서 혼자 우산을 썼다.

서점 앞에 도착했을 때, 처마 밑에 선 최노인이 보였다. 고무신 앞코가 비에 젖어 반들거렸다.

“아침부터 문 닫았길래 어디 갔나 했더니.”

최노인은 그녀 뒤에 선 서지헌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가 반가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자네도 왔구먼. 둘이 같이 있으니 옛날 생각 나네. 삼촌 살아 계실 때는 자네들 맨날 같이 다녔잖나.”

윤하늘은 셔터를 올리며 대꾸하지 않았다.

“비 맞지 말고 들어오세요.”

서점 안으로 들어서자 최노인은 카운터 옆 의자에 앉으며 젖은 무릎을 툭툭 쳤다.

“구청 갔다 왔나 보네. 재개발 일 때문에?”

“네. 공청회 일정 확인하고 왔어요.”

최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서지헌을 돌아봤다.

“자네, 아버지 일은 이제 좀 정리됐나. 그때 집안이 많이 어려웠다면서.”

서지헌의 손이 멈췄다. 젖은 우산을 우산꽂이에 꽂으려던 동작 그대로, 손목만 약간 경직된 채였다. 윤하늘은 그 손을 보았다.

“예전 일입니다.”

서지헌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벽을 치는 방식으로 정중했다.

최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때 이 동네서도 꽤 큰일이었잖나. 한순간에—”

“최 어르신.”

서지헌이 우산을 꽂고 돌아섰다. 표정은 평온했지만 입가가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서점 운영에 관한 법률 자문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과거 이야기보다 지금 상황이 더 급합니다.”

최노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나도 할 말 많은 거 아니네.”

주머니에서 사탕 두 개를 꺼내 카운터 위에 놓았다.

“허기 질 때 먹어. 둘 다 얼굴이 깡마른 게.”

문이 닫혔다. 우산도 쓰지 않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최노인의 뒷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흐릿해졌다. 서점 안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고, 빗소리만이 공기를 채웠다.

윤하늘은 카운터 옆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집안이 많이 어려웠다'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가 십 년 전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이유를, 그녀는 단 한 번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확실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구체적인 형태가 생겼다. 가족 파산. 그가 짊어질 수밖에 없었을 어떤 무게.

서지헌은 카운터 건너편 작은 테이블에 앉아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변호사 업무용 파일들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서류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손끝만 움직이고, 시선은 종이에 고정된 채였다.

그 모습을 윤하늘은 카운터에서 바라봤다. 다가가서 묻고 싶은 말은 수십 개였지만, 한 걸음도 옮기지 않았다.

거리가 더 벌어졌다. 분명 아침보다, 구청보다, 더 멀어져 있었다.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한층 거칠어졌다.

오후로 갈수록 장마비는 더 굵어질 모양이었다. 윤하늘은 카운터 위에 놓인 사탕 두 개를 서랍 속에 밀어넣고, 공청회 안내문을 꺼내 펼쳤다. 글씨는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서점 문이 닫히고 한참 동안 윤하늘은 카운터에 서 있었다. 최노인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친구, 십 년 전에…….

빗소리가 가늘게 창을 두드렸다.

윤하늘은 서점 문을 잠그고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재개발 공고가 붙은 가로등 아래를 지나 반찬가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최노인의 가게는 거리 모퉁이에 붙어 있었다. 진열대에는 멸치볶음과 깻잎장아찌가 담긴 플라스틱 통이 가지런했다. 문을 열자 고추장과 참기름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최노인의 가게는 거리 모퉁이에 붙어 있었다. 진열대에는 멸치볶음과 깻잎장아찌가 담긴 플라스틱 통이 가지런했다. 문을 열자 고추장과 참기름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최노인은 계산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배추를 다듬고 있었다. 윤하늘의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왔나.”

윤하늘은 우산을 접어 문 옆에 세웠다. 최노인은 의자를 끌어당겼다.

“앉아.”

윤하늘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구석에는 반쯤 비워진 소주잔이 놓여 있었다.

“서지헌이 말인데요.”

최노인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 친구 집안…… 십 년 전에 무슨 일 있었나요.”

“몰랐나.”

“네.”

최노인은 배춧잎을 한 장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그 집, 그때 확 망했어. 아버지가 크게 부도 났는데…… 보증 잘못 섰다가 집이고 가게고 다 넘어갔지. 서지헌이는 그때 대학도 제대로 못 다녔어. 아버지 따라서 빚 정리하느라 밤낮없이 뛰었고.”

윤하늘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

“식구들 데리고 여기 뜰 때도 제대로 인사도 못 했을 걸. 워낙 급하게 가는 바람에.”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어르신은 자세히 아세요?”

최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 시절 서점에서 일하던 때 일인데……”

그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물끄러미 배추 통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닦으며 일어났다.

“그 친구, 그때 아마 네게 말도 못 하고 떠나서 많이 괴로워했을 게야.”

빗소리가 가게 지붕을 두드렸다. 윤하늘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밥은 먹었나. 반찬 좀 가져가.”

최노인은 플라스틱 통 두 개를 비닐봉지에 담아 내밀었다. 윤하늘은 봉지를 받아 들고 일어섰다.

“얼마예요.”

“됐다. 가서 밥이나 챙겨 먹어.”

윤하늘은 우산을 챙겨 문을 열었다. 뒤돌아보았지만 최노인은 고개를 숙인 채 배추를 만지고 있었다.

가랑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반찬 봉지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지헌이 단순히 떠난 것이 아니었다.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가능성이었다. 십 년간 견고했던 원망에 금이 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골목을 걸었다.

오후 네 시가 되자 서지헌이 서점으로 돌아왔다.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든 손에 핏줄이 섰다. 그는 카운터 옆 탁자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짧게 고개 숙였다.

“공청회 접수증 찾아왔습니다.”

윤하늘은 카운터에서 일어났다. 서지헌은 서류 봉투에서 접수증을 꺼내 올려놓았다.

“의견서도 같이 접수했고, 발언 등록도 마쳤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윤하늘은 접수증을 집어 들었다. 날짜와 접수 번호가 찍힌 도장이 선명했다. 그녀는 접수증을 봉투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최노인분께 들었어요. 십 년 전에……”

“그 이야기는 지금 중요하지 않습니다.”

서지헌이 말을 잘랐다. 짧고 차가운 존댓말에 윤하늘의 숨이 멎었다.

“공청회에 집중하시죠.”

윤하늘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헌은 이미 등을 돌리고 탁자 위에 서류를 펼치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빠르게 안건과 법조항을 분류했다. 서점 안에 굵어진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만 가득 찼다. 서지헌은 윤하늘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의견서 사본은 여기 두겠습니다. 진술서 초안은 내일까지 검토해서 보내죠.”

“……알겠습니다.”

“읍사무소에 제출할 서류 목록도 정리했으니 확인하십시오.”

그는 서류 뭉치를 가지런히 정돈해 탁자 한쪽에 밀어놓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윤하늘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불러 세우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서지헌은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우산을 펴는 손이 망설이는 듯했으나 곧 문을 열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점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윤하늘은 카운터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서지헌의 뒷모습은 굵은 빗줄기 속으로 금세 사라졌다.

그녀는 공청회 안내문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다음 주 화요일 오후 두 시. 날짜를 확인하던 손가락이 멈췄다.

가로등 불빛이 빗속에서 흐릿하게 번졌다. 십 년 전에도 비가 왔었다. 서지헌이 아무 말 없이 사라졌던 날, 윤하늘은 이 서점에서 그를 기다렸다.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 결국 그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주도.

찢어버린 편지의 기억이 희미하게 스쳐 올랐다. 윤하늘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접었다. 손끝이 안내문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장맛비는 여전히 거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