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
6화
밤새 굵어진 빗줄기가 아침까지 이어졌다. 윤하늘은 서점 셔터를 올리자마자 지하 계단 쪽에서 올라오는 눅눅한 공기에 어깨가 굳었다. 전날 서지헌이 떠난 뒤 카운터에 오래 앉아 있다가 그대로 잠들었고, 깨어나서도 최노인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떠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사실만으로 십 년의 원망이 무너지진 않았다. 대신 낯선 불편함이 자리 잡았다. 미워할 자격을 빼앗긴 듯한,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던 듯 대할 수도 없는.
그녀는 손전등을 챙겨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중간쯤에서부터 신문지 눅은 냄새와 곰팡이 포자가 섞인 공기가 숨을 조였다. 지하 창고 바닥은 물기가 번들거렸고, 벽 틈새 두 군데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지난번 옮기지 못한 고서 상자 세 개가 구석에 쌓여 있었다. 윤하늘은 가장 위 상자를 열었다. 1970년대 초판 시집의 표지가 물결처럼 일어나고, 가장자리가 누렇게 번져 있었다. 손끝이 닿자 페이지가 눅눅하게 들썩였다.
“아……”
숨이 짧게 멎었다. 삼촌이 생전에 가장 아끼던 절판본들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책을 한 권씩 꺼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상자에서는 80년대 소설 초판본 여섯 권이 비슷한 상태였다. 표지 변색은 덜했지만 책등 접착부가 습기로 들떠 있었다. 세 번째 상자는 그래도 상태가 나았다. 벽에서 가장 먼 쪽에 있었고, 뚜껑을 덮어둔 덕분에 직접적인 물 접촉은 피한 모양이었다.
윤하늘은 훼손된 책들을 두 팔 가득 안고 1층으로 올라왔다. 카운터 옆 빈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구석에 둔 비닐 봉투를 찾아 찢어 펼쳤다. 책을 한 권씩 비닐로 감싸며 손이 빨라졌다.
습기는 아직 퍼지고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나머지 상자들도 며칠 안에 똑같이 망가질 게 분명했다.
보존 방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윤하늘은 손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 연락처에서 서지헌의 이름을 찾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전화번호는 새로 등록된 것이었지만,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 번 숨을 골랐다. 어제 그가 잘라낸 말투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건 업무였다. 서점을 지키는 일. 그가 하겠다고 한 바로 그 일.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서지헌입니다.”
짧고 정확한 목소리. 윤하늘은 전날의 거절을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지하 창고 습기가 심해요. 절판본들 상태가…….” 잠시 텀을 두고 말을 이었다. “혹시 고서 보존 잘 아는 곳, 알고 있나 해서요.”
“심합니까.”
“표지 변색에 페이지가 눅눅해진 게 여섯 권. 나머지는 아직 괜찮은데 이 상태로는 며칠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아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윤하늘은 그가 망설일 거라 생각했다. 전날처럼 거리를 두거나, 업무적인 답변만 짧게 하고 끊을 거라고.
“종이숲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시내 쪽인데, 제가 아는 고서점 중에선 가장 보존 처리를 잘해요.”
서지헌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거절은 없었다.
“같이 가 주실 수 있어요.”
한 박자 늦게 덧붙인 말은 의문이 아니라 청유에 가까웠다. 수화기 너머에서 우산 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금 가시죠. 서점 앞으로 갈게요.”
전화가 끊겼다.
윤하늘은 훼손된 책들을 쇼핑백에 조심히 담고, 비닐로 한 겹 더 덮었다. 입구로 나가 문을 열자 차가운 빗발이 얼굴에 닿았다.
서지헌은 이미 건너편 가로등 아래에 서 있었다. 검은 우산을 쓰고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채였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우산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튀었다.
그가 먼저 길을 건너왔다. 우산을 살짝 기울여 윤하늘 쪽을 가렸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네.”
윤하늘은 쇼핑백을 가슴 앞으로 끌어안았다. 두 사람 사이로 빗줄기가 쏟아졌지만 우산이 그 위를 가리고 있었다. 어제 그가 등 돌리며 걸어가던 뒷모습이 잠깐 스쳤다.
“종이숲은 처음이에요.”
“절판본 전문이니까 상태 진단은 바로 나올 겁니다.”
서지헌은 골목 끝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버스 정류장 방향이었다.
윤하늘은 그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전날의 냉랭함은 여전히 그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서점의 책들이 먼저였다. 서지헌도 마찬가지인 듯,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우산을 든 손을 약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버스 안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지만 말은 없었다. 창밖으로 빗물이 흘러내리는 속도만 달라졌을 뿐, 정류장을 네 개쯤 지날 때까지 서지헌의 우산 쓴 손은 그대로 창가에 기대어 있었다. 이십 분 뒤 정류장에 내리자 골목은 더 좁아졌고, 비에 젖은 벽돌담 사이로 ‘종이숲’이라 적힌 낡은 간판이 보였다.
종이숲은 시내에서 버스로 이십 분 남짓한 골목 모퉁이에 자리 잡은 고서점이었다. 비에 젖은 간판의 글씨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좁은 출입구 옆으로 책이 쌓인 상자들이 비닐을 덮은 채 놓여 있었다.
윤하늘은 우산을 접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습기가 뒤섞인 공기가 폐 깊숙이 스몄다. 서지헌은 그녀보다 한 발 늦게 들어와 우산을 문 옆 꽂이에 세웠다.
“절판본 관리 참고서적은 오른쪽 안쪽 서가입니다.”
서지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밤 서점을 떠난 뒤 처음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리만치 담담한 어조였다. 윤하늘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둘은 안쪽 서가로 함께 걸어갔다. 필요한 책 세 권을 찾는 데는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서지헌이 책등을 확인하고 한 권씩 건넸다.
윤하늘은 품에 안으며 책의 상태를 살폈다. 찢어진 책등, 누렇게 변색된 속지, 십 년 묵은 곰팡이 냄새. 서점 지하 창고의 상자들과 닮은 냄새였다.
계산대로 향하려던 윤하늘의 발걸음이 문학 코너 앞에서 멈췄다.
서가 세 번째 칸, 눈높이에서 살짝 아래쪽.
낡은 양장본 한 권이 다른 책들 사이에서 등을 내보이고 있었다. 짙은 감색 표지, 금박으로 찍힌 제목 글자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윤하늘은 손을 뻗었다가 허공에서 멈칫했다.
십 년 전 서점에서 밤새워 읽던 책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아직 오지 않은 아침을 기다리며, 서지헌이 이 책을 읽어봤냐고 물었다. 둘은 그날 이후로 함께 책을 읽었다. 한 권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페이지를 넘기던 여름이 있었다.
손이 책등에 닿았다. 그 순간 다른 손이 겹쳐졌다. 서지헌이었다.
윤하늘은 숨을 들이켰다. 서지헌의 손은 따뜻했다. 빗속을 걸어온 지 십 분도 넘었는데, 손끝에서 열이 느껴질 만큼.
서지헌이 손을 먼저 뗐다.
“절판된 지 오래된 책입니다.”
말투는 평온했다. 마치 이 책이 어떤 책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네.”
윤하늘도 손을 내렸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평소보다 한 톤 높았다. 감정이 들키지 않으려다 실패한 소리였다.
서지헌은 책을 꺼내 표지를 살폈다. 속표지에 찍힌 장서인의 흔적, 모서리에 밴 커피 자국. 십 년 동안 누군가 읽고 또 넘겼을 흔적이었다.
그는 책을 다시 서가에 밀어넣었다.
“가시죠.”
윤하늘은 꽂힌 책등을 잠시 바라봤다. 서가 틈새로 빛이 얇게 갈라져 책등에 닿았다. 십 년 전 서점에서 늦은 밤까지 읽던 그 책을 보며 웃던 서지헌의 얼굴이 겹쳐졌다가 흩어졌다.
“계산합시다.”
윤하늘은 몸을 돌려 계산대 쪽으로 걸었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서지헌은 잠시 뒤 같은 속도로 따라왔다. 둘 사이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계산대에 선 윤하늘이 절판본 관리 서적 세 권을 올려놓았다. 점원은 아무 말 없이 바코드를 찍고 합계를 불렀다. 윤하늘은 지갑을 꺼내다가 멈칫했다. 서지헌이 계산대 위에 법인카드를 먼저 올려놓고 있었다.
“사무소 경비 처리합니다. 업무 관련 도서니까요.”
윤하늘은 한동안 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결국 지갑을 가방에 다시 넣었다.
“영수증 챙기시죠. 필요하면.”
점원이 영수증을 내밀었고, 서지헌이 받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윤하늘은 책이 담긴 종이가방을 받아들고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서지헌이 문을 밀어 열었다. 우산을 펼치는 동작이 이전보다 조금 빨랐다. 그가 먼저 빗속으로 걸어나갔다.
윤하늘은 가게 밖에서 우산을 펴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빗줄기가 우산 천을 때리는 소리만 거리를 채웠다.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걸었지만, 발걸음의 속도는 어긋난 채였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들 때까지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서점 안으로 들어서자 눅눅한 공기가 먼저 코에 닿았다. 오후 늦게 잦아들었던 빗줄기가 다시 굵어지고 있었다.
윤하늘은 현관 옆 선반에 우산을 꽂으며 서점 안을 둘러봤다. 서지헌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탁자 위에는 절판본 몇 권이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로 비닐 커버와 종이테이프가 놓여 있었다. 그는 책등이 헐거워진 문고본에 얇은 종이테이프를 덧대고 있었다. 들어온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윤하늘은 가방을 카운터에 내려놓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비닐 커버는 충분해요?”
“넉넉합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어제보다 한층 더 차가운 톤이었다. 윤하늘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펼쳐진 책들에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작업을 이어갔다. 책등을 펴고, 접착 테이프로 덧대고, 비닐로 감싸 분류 바구니에 옮기는 일. 손끝이 가끔 스쳤지만 둘 다 모른 척했다.
마지막 책을 비닐로 감싸자 서지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챙기는 손놀림이 정확하고 빨랐다.
“서류는 모두 준비됐으니 공청회 전에 한 번 더 검토하시죠.”
“……네.”
윤하늘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강다은이 쏟아져 들어왔다. 낡은 청바지에 후드 집업 차림이었다. 목에는 언제나처럼 커다란 헤드폰이 걸려 있었다.
“언니, 나 서명용지 가지러 왔어! 아, 서지헌 씨도 계셨네요——”
강다은은 경쾌하게 인사하며 탁자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걸음을 멈췄다. 서지헌의 굳은 옆얼굴을 보고, 이어 윤하늘과 눈이 마주쳤다.
눈치 빠른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요즘 둘 사이에 비라도 새는 거 아니야?”
윤하늘의 어깨가 순간 올라갔다.
“무슨 소리야.”
“아니, 분명 어제보다 더…….”
“다은아.”
윤하늘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강다은은 그 짧은 어조에 입을 다물었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서지헌 쪽을 슬쩍 바라봤다.
서지헌은 표정 변화 없이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강다은을 향해 목례를 짧게 하고 문 쪽으로 걸어간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강다은 씨, 수고하세요.”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문이 닫히고 빗소리가 다시 방 안을 채웠다.
강다은은 카운터 옆 서류함에서 서명용지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저 변호사님 원래 저렇게 차가운 사람이었어, 언니?”
“……원래 그런 사람이야.”
강다은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서명용지를 가방에 넣었다. 윤하늘은 그 미소를 외면한 채 탁자 위에 남은 비닐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그럼 나 갈게. 내일 또 들를 테니까 그때는 좀 더 따뜻한 분위기로 부탁해, 언니.”
강다은은 빠른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다시금 적막이 찾아왔다.
윤하늘은 탁자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빗소리는 더 거세졌다. 서점 안에는 노란 스탠드 불빛 하나만 켜져 있었다.
윤하늘은 카운터 구석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강다은이 남기고 간 말이 귀에 맴돌았다. 둘 사이에 비라도 새는 거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한 번 저은 뒤 중고서점 사이트를 열었다. 낮에 종이숲에서 보았던 책의 표지가 기억에 남아 있었다. 십 년 전, 이 서점의 서가 한구석에 꽂혀 있던 것과 똑같은 판본. 표지의 색감도, 제목의 서체도 똑같았다. 검색창에 책 제목을 입력하자 곧바로 검은색 표지의 썸네일이 떠올랐다.
윤하늘은 망설이다 클릭했다.
판매자의 스캔 이미지가 스크롤을 따라 펼쳐졌다. 표지 안쪽, 첫 장을 넘기자 연필로 그은 가느다란 밑줄이 보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결국 자신을 붙잡아 두는 일이다.
윤하늘의 손가락이 멈췄다.
밑줄은 한 줄이 아니었다. 여러 페이지에 걸쳐 누군가의 손길이 남아 있었다. 어떤 문장에는 물결표가 쳐져 있었고 어떤 연필 자국은 지워지다 말아 희미했다.
그녀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창밖에서는 굵어진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리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십 년 전 밤이 떠올랐다. 찢어버린 편지의 첫 문장이 희미하게 스쳤다. 네가 떠나도 나는 여기 있을 거야—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윤하늘은 천천히 노트북을 덮었다.
빗소리만이 서점 안에 가득했다. 그녀는 스탠드 불빛 아래 오래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