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
7화
아침 일곱 시 사십 분, 서점 앞에 도착했을 때 비는 어제보다 약간 가늘어져 있었다. 윤하늘은 우산을 접으며 멈칫했다. 출입구 옆 벽에 서지헌의 검은 우산이 이미 기대어 있었다.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찍 오셨네요.”
서지헌은 카운터 옆에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지만 시선은 곧장 휴대폰으로 돌아갔다.
“잠이 안 와서요.”
짧은 대답이었다. 윤하늘은 가방을 카운터에 내려놓고 지하창고로 향하는 계단의 불을 켰다. 지난밤 빗소리 때문에 거의 뜬눈으로 지새운 탓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상태가 확산됐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 내려가 보시죠.”
서지헌이 그녀보다 반 발짝 앞서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창고 공기는 이틀 전보다 더 눅눅했다. 벽 두 군데에서 아직도 물기가 배어 내리고 있었고, 환기구 아래 상자들은 바닥의 골판지가 축 처질 정도로 젖어 있었다. 윤하늘은 코끝을 찡그렸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전보다 짙어져 있었다.
“여기 상자는 거의 다 포기하셔야겠습니다.”
서지헌이 구석에 쌓인 상자 세 개를 손으로 가리켰다. 종이숲에서 배워온 보존 처리로도 손쓸 타이밍을 놓친 것들이었다.
“안에 책은 확인해 봐야죠.”
“표지가 판에 붙은 건 뜯어내는 순간 찢어집니다. 내용 보존도 불가능해요.”
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없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전달할 뿐이라는 태도였다. 윤하늘은 그 곁으로 걸어가 상자를 들여다봤다. 1970년대에 출간된 시집 세 권, 80년대 초판 소설 두 권. 모두 표지가 바닥 종이에 들러붙어 있었다.
“이건…….”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버리시는 게 낫습니다. 포자 번식하면 위층 책들에도 영향이 갑니다.”
서지헌은 이미 다른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벽에서 가장 먼 선반의 책들을 꺼내 빈 플라스틱 상자에 옮기기 시작했다. 말없이, 신속하게.
윤하늘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제 종이숲에서 보여줬던 미묘한 동요는 온데간데없었다. 다시 벽을 쌓은 사람 같았다.
그녀도 작업을 시작했다. 한쪽 벽면에 빼곡했던 문고본들을 한 권씩 꺼내어 마른 수건으로 겉면을 닦았다. 습기가 덜한 책들은 책등을 아래로 세워 통풍이 되게 배치하고, 이미 얼룩이 번진 책들은 따로 분류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서가에서 책이 빠지는 둔탁한 소리, 바닥에 상자가 끌리는 소리, 천장의 형광등이 불안하게 깜빡이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윤하늘은 구석에 몰아둔 판지 상자 하나를 열었다. 상자 겉면에는 ‘99-07’이라고 삼촌의 글씨로 적혀 있었지만, 바닥이 흠뻑 젖어 손으로 받치자 너덜너덜 찢어졌다. 안에서는 1990년대 문고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책들을 한 권씩 집어 들었다. 표지가 마르지 않아 손끝이 금방 물기에 젖었다. 한참을 그렇게 꺼내던 중, 손에 잡힌 책 하나가 유난히 두꺼웠다.
80년대에 나온 유명 소설의 절판본이었다.
윤하늘은 책을 펼쳤다. 페이지들 사이로 곰팡이 냄새가 올라왔다. 앞부분 몇 장은 습기를 먹어 종이가 서로 붙어 있었고, 중간중간 물얼룩이 번져 인쇄된 글자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책장을 한 장씩 넘겼다. 그리고 중간쯤에서 손이 멈췄다.
책갈피 대신 끼워져 있던 것은 봉투였다. 낡은 편지 봉투 한 장. 습기로 인해 종이가 희부옇게 투명해져서, 안쪽에 접힌 편지지의 자취가 은은하게 비쳤다. 봉투 앞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받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써 있지 않은 백지 상태.
그녀는 봉투를 집어 들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젖은 종이는 거의 무게가 없었고, 가장자리는 손가락이 닿는 것만으로도 문드러질 것처럼 약해져 있었다.
가슴속이 조여들었다.
—네가 떠나도 나는 여기 있을 거야.
어젯밤 스쳐간 편지의 첫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자신이 찢어버렸던, 자신이 썼던 편지. 그 편지의 주인은 지금 이 지하창고에 함께 있었다.
“뭔가 찾으셨습니까.”
뒤에서 서지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하늘은 화들짝 놀라 어깨가 올라갔다. 언제 다가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등 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냥, 오래된 책갈피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늘게 나왔다. 일부러 태연한 척 봉투를 내려놓으려다가, 그 순간 서지헌의 시선이 봉투 위에 닿았다.
찰나였다. 그의 눈빛에 무언가 스쳤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입가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지만, 그뿐이었다.
“버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윤하늘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봉투가 살짝 구겨질 뻔했다. 그녀는 숨을 천천히 내쉬며 감정을 눌렀다. 왜 이렇게까지 차갑게 구는지 이유는 짐작이 갔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뭔지 확인도 안 했어요.”
“확인할 필요 없는 물건도 있습니다.”
서지헌은 딱 잘라 말하고 몸을 돌렸다. 그는 작업 중이던 선반으로 돌아가 등을 보인 채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동작에는 어떤 머뭇거림도 없었다. 대화는 끝났다, 라고 선언하는 듯한 태도였다.
윤하늘은 봉투를 든 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심장이 공허하게 뛰었다.
버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이 귀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편지 내용도, 보낸 사람도, 왜 봉투에 이름 하나 쓰여 있지 않은지도 전혀 모르는 채였다. 그런데도 가슴 한복판이 묵직하게 눌렸다.
서지헌의 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윤하늘은 천천히 손을 내려, 봉투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세 번 접어 두께를 최대한 줄인 뒤, 린넨 셔츠의 옆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가 났지만 서지헌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오른손은 틈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주머니 쪽으로 내려갔다. 엄지손가락으로 주머니 너머 봉투의 형태를 더듬었다. 젖어서 차가운 종이의 감촉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가슴속 억울함과 혼란이 조금씩 더 깊어졌다.
서지헌은 이후 한 시간 동안 단 한 마디도 더 하지 않았다. 가장 심하게 훼손된 책들만 골라 무표정하게 골판지 상자에 담았다. 윤하늘도 입을 열지 않았다. 봉투는 주머니 속에서 체온에 서서히 말라갔다.
지하창고의 형광등이 다시 한 번 깜빡였다. 빗소리는 지상에서부터 벽을 타고 내려와 은은하게 공간을 울렸다.
마을회관은 비에 젖은 상가 거리를 십 분쯤 걸어 들어간 골목 안쪽에 있었다. 장마 탓에 공기는 무거웠고, 회관 안으로 들어서자 곰팡내 비슷한 습기가 코를 찔렀다. 형광등이 깜빡이고 있었고, 접이식 테이블이 길게 놓인 방 안에는 이미 십여 명의 상인들이 모여 있었다.
강다은은 입구 쪽 벽에 붙어 인쇄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서지헌은 그보다 두 걸음 뒤에서 들어와 맨 안쪽 구석에 섰다. 윤하늘은 잠시 망설이다 중앙쯤 되는 자리에 앉았다.
반찬가게 최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러다 다 넘어간다니까. 우리끼리 뭉쳐서 구청에 가야 하는 거 아녀?”
옆에 있던 철물점 주인이 맞장구쳤다. “맞아. 다음 주 화요일 공청회 때 우리도 나가서 얘기해야지.”
“의견서 내고 서명만 받아도…”
“그걸로 되겠어? 구청에서 우리 말 들어준 적 있냐.”
말이 오가는 사이 서지헌이 팔짱을 풀었다.
“공청회 발언 등록은 사흘 전에 마감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서지헌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어조는 단호했다.
“지금 말씀하시는 건 법적 절차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의견서는 이미 접수했고, 서명도 받는 중입니다. 그다음은 심의 과정에서 우리 주장을 뒷받침할 구체적 근거를 정리하는 단계입니다.”
“변호사님이 말은 잘하지. 근데 우리가 뭐 그렇게 기다릴 여유가 있나.”
철물점 주인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윤하늘은 숨을 짧게 골랐다.
“절차도 중요하지만, 일단 목소리를 내는 게 먼저 아닌가요.”
서지헌이 그쪽을 돌아봤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윤하늘은 등을 곧게 폈다.
“이미 공청회 전에 우리끼리 한 번 연대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가 번영회 명의로 성명서라도 내는 게…”
“성명서만 내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서지헌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이런 식이면 모두가 피해를 봅니다.”
윤하늘은 그 말투에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십 년 전, 비슷한 빗소리가 들리던 밤 서점 앞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썼던 그 말투.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그때도 이렇게 정중하고, 또렷하고,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이 저절로 무릎 위에서 접혔다.
강다은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두 분 다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접근 방식이 다르네요. 일단 의견 조율을…”
“됐어요.”
윤하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이쯤 하고 제가 정리해서 다시 연락드릴게요.”
상인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서지헌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다시 팔짱을 꼈다. 입이 굳게 다물려 있었다. 강다은이 무언가 덧붙이려다 손을 내렸다.
빗소리만 한동안 회관 안을 메웠다.
밤 열한 시가 넘어서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 서점 2층, 윤하늘의 방은 좁았고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다.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카디건 주머니를 더듬었다. 낮에 마을회관에서 입었던 그대로였다. 손끝에 닿은 종이는 축축하고 낡은 봉투였다.
지하 창고에서 발견한 편지 뭉치 중 한 장이었다. 아직 개봉하지 않았다. 봉투는 습기를 머금어 군데군데 변색되어 있었고, 모서리는 흐물흐물했다. 겉면에 적힌 글씨는 번져서 읽을 수 없었다.
윤하늘은 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참 들여다봤다.
스탠드 불빛 너머로, 머릿속 어딘가에서 십 년 전 밤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날도 비가 오고 있었다. 서점 카운터에 엎드려 편지를 쓰던 기억. 볼펜으로 몇 번이고 다시 시작했던 문장들. 찢어서 구겨버린 종이들이 탁자 밑에 흩어져 있었다.
보고 싶어.
그 문장은 두 번 썼다 지웠다. 첫 번째는 너무 직설적이어서, 두 번째는 너무 유치해서 찢었다.
가지 마, 내가 잘못했어.
그건 중간쯤에서 펜을 멈췄다. 잘못한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돌아와.
다음 페이지에 한 줄만 썼다. 글씨는 떨리고 있었다. 그 한 줄을 찢지 않고 종이를 네 번 접어 서랍 속에 넣었다. 그리고 그 편지는 결국 보내지 못했다.
윤하늘은 눈을 감았다. 손가락이 낡은 봉투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밤 최종적으로 완성한 편지는—아니, 완성이란 표현도 거창했다. 밤새 쓰고 찢고 다시 쓰고, 마지막에는 찢어버린 조각들만 남았다.
마지막 문장이 기억나지 않았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무슨 말을 쓴 걸까.
봉투를 접어 카디건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깊은 숨이 새어나왔다. 빗소리가 창문을 때렸다.
다음 날 아침, 비는 굵기가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윤하늘은 무거운 빛깔이었다.
윤하늘은 거의 잠을 못 자고 서점 1층으로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평소보다 둔했다. 눈이 약간 부었고, 머리는 제대로 묶지 않아 어깨 위로 풀어져 있었다.
서점 안은 어두웠다. 그녀가 스탠드를 켜기도 전에, 눈에 익은 실루엣이 북쪽 서가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서지헌이었다.
그는 검은 우산을 문 옆에 기대 세워두고,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책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인기척도 거의 내지 않았지만, 윤하늘은 그가 거기 있다는 걸 계단 중간에서부터 알고 있었다.
“……일찍 왔네.”
말을 하기 전에 한 박자 텀이 있었다. 서지헌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일찍 깨어서 잠깐 들렀습니다.”
“비 오는데.”
“우산 있습니다.”
짧은 대화 후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윤하늘은 카운터로 걸어가 스탠드를 켰다. 탁자 위에는 어제 밤 치우지 않은 머그잔과 메모지가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머그잔을 정리하려다 손끝이 카운터 구석에 걸렸다.
좁은 틈 사이로, 낡은 봉투 한 장이 모서리만 삐져나와 있었다.
지하 창고에서 발견했던 편지 뭉치 중 하나였다. 어제 정리하다가—아니, 언제 거기 낀 걸까.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봉투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겉면에 적힌 것은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봉합선을 따라 살짝 찢어진 곳에 곰팡이 자국이 피어 있었다. 십 년도 더 묵은 종이 냄새가 손끝에 배어들었다.
윤하늘은 들고 있던 봉투를 내려다본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서지헌은 북쪽 서가에서 어떤 책을 꺼내 표지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을 보았을 텐데도 묻지 않았다.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비스듬히 기운 어깨 너머로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무표정하고 조용했다.
윤하늘은 봉투를 왼손으로 접었다. 바삭한 종이의 감촉이 손바닥에 남았다. 그녀는 숨을 한 번 짧게 들이쉬고 편지를 카디건 안주머니에 밀어넣었다. 단추를 채우는 손끝이 살짝 느렸지만 흔들리지는 않았다.
“법률 사무소에서 연락 왔네.”
목소리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담담했다. 서지헌이 책을 도로 꽂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침에 확인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서가 옆에 조용히 머물렀다.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빗소리는 여전히 처마를 두드리고 있었다.
오전의 희미한 빛이 젖은 창문을 통해 들어왔지만 서점 안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윤하늘은 손이 허공에서 멈춘 채, 스탠드 불빛 아래 잠시 눈을 감았다.
주머니 속 편지의 모서리가 갈비뼈 아래를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그 촉감은 전날 밤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그 문장을 불러냈다. 십 년 전 마지막 밤, 찢어진 종이 더미 속에서 한 줄기처럼 남아 있던 문장이 갑자기 뚜렷해졌다.
제발 가지 마. 네가 없으면 나는…
윤하늘은 손을 내렸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스탠드 불빛이 카운터 위에 고요하게 퍼져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