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

8화

아침이 와도 빗줄기는 가늘어지지 않았다. 윤하늘은 서점 입구에서 우산을 접으며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밤새 잠을 거의 못 자서 눈이 뻑뻑하고 어깨가 무거웠다.

서점 안은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북쪽 창가 테이블에 서지헌이 앉아 있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삼십 분은 빨랐다. 펼쳐진 신문 너머로 고개를 들지 않았고, 손에 든 커피 잔에서 김이 희미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게 깔렸다. 서지헌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여전히 신문에 머물러 있었다. 윤하늘은 젖은 우산을 현관 통에 꽂고 카디건 소매를 정리했다. 주머니 속에서 편지 봉투 모서리가 손끝에 닿았다. 전날 밤의 그 촉감이 아직 남아 있었다.

카운터로 가는 길에 멈칫, 발이 멎었다. 서지헌의 옆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신문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턱 선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비스듬히 보이는 지면 한켠에 익숙한 상호가 눈에 들어왔다.

재개발 예정 구역 내 영세 기업주 연쇄 부도… 10년 전 파산

시선이 그 자리에 딱 붙었다. 십 년 전 파산. 서지헌 아버지의 상호였다.

최노인의 말이 순간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친구, 십 년 전에 집안이 통째로 망했어. 집이고 가게고 다 날리고 밤에 도망치듯 떠났다고.

숨을 들이쉬자, 아침의 축축한 공기가 폐 깊숙이 밀려들었다.

서지헌이 신문을 접었다. 윤하늘의 시선을 감지했다는 듯 천천히 일어나 접은 신문을 탁자 구석에 밀어 넣었다. 동작은 느렸지만 신문을 내려놓는 손끝이 백색으로 질려 있었다. 눈을 들어 마주하는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오늘은 공청회 발언자 명단 정리부터 하겠습니다. 마을회관에 확인할 서류가 있습니다.”

“잠깐.”

윤하늘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서지헌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전날보다 더 무거웠다. 무언가를 덮어놓은 듯한,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의 눈이었다.

“뭘 보셨습니까.”

물음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어조는 평온했지만 문장 끝이 미세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십 년 전 도망치듯 떠났다는 것, 대학도 그만뒀다는 것, 가족이 파산했다는 것. 묻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보신 거죠.” 서지헌이 말했다. “그렇지만 저희가 지금 다뤄야 할 사안은 아닙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서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책과 서류를 챙겨 서점 안쪽 구석 테이블로 옮겨 앉는 동작은 정확하고 신속했다. 등을 돌리지는 않았지만 시선은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윤하늘은 그 자리에 선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열 걸음도 안 되는 거리였는데, 어제보다 더 단단한 벽이 앞에 세워진 느낌이었다. 빗소리가 처마를 두드렸다. 창밖 처마 끝에서 물이 길게 떨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카운터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서지헌이 접어둔 신문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한 손을 뻗었다 멈칫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아까 본 기사를 찾아 펼쳤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십 년 전 가족의 파산. 아버지의 빚을 갚느라 대학을 그만뒀던 스무 살의 서지헌. 그날 아침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고, 윤하늘은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왜 떠났냐고, 왜 아무 말도 없었냐고.

묻는 대신 원망했다. 원망이 더 쉬웠다.

그런데 이제 그 원망의 바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신문을 접던 손이 떨렸던 것도, 단호하게 등을 돌리던 눈빛도—그 모든 것이 그녀가 알지 못했던 십 년의 무게를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맞은편 구석에서 서류 넘기는 소리가 났다. 서지헌은 이미 노트북을 펼치고 서류 더미를 정리하며 공청회 자료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오늘 해야 할 일, 내일 마감인 서류, 그 너머의 일정. 허락된 유일한 대화는 법적 절차와 행정 절차뿐이었다.

윤하늘은 신문을 다시 탁자 위에 밀어 놓았다. 왼손 엄지가 무의식적으로 검지 손톱을 눌렀다. 카운터에 내려앉은 먼지가 스탠드 불빛 아래 천천히 흩어졌다. 그녀는 신문을 접어서 서랍 속에 밀어넣었다.

서점 안에는 빗소리와 서류 넘기는 소리만 남았다. 장마의 축축한 기운이 바닥부터 스며들듯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스탠드를 켜고 공청회 안내문을 꺼내 펼쳤다. 글자는 여전히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비에 젖은 유리 너머로 상가 거리의 가로등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오후의 지하창고는 여전히 눅눅했다. 벽 틈새 두 곳에서 번진 물자국이 회색 콘크리트를 따라 길게 늘어져 있었고, 환기구 아래쪽은 바닥까지 어둑하게 젖어 있었다. 강다은이 먼저 계단을 내려왔다.

“와, 여기 아직 이렇네.”

고무장갑을 끼며 구석에 쌓인 골판지 상자들을 훑었다. 상자들은 전날보다 더 말랑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바닥 쪽 골판지는 찢어져 책 모서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서지헌은 그 옆에서 말없이 작업용 앞치마를 허리에 묶었다. 윤하늘은 반대편 구석에서 물먹은 신문지를 걷어내고 있었다.

“이건 통째로 버려야겠는데.”

강다은이 상자 하나를 들어 올리려다 내려놓았다. 바닥이 흐물거려 손으로 떠받치자 종이가 젖은 흙처럼 묻어났다. 상자 안에 손을 넣어 책들을 한 권씩 꺼내기 시작했다.

“윤하늘 씨, 이거 상태 봐요. 표지가 아예 들러붙었어.”

윤하늘은 짧게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신문지로 시선을 돌렸다. 서지헌은 근처 선반에서 마른 걸레를 꺼내 틈새 물기를 닦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공구 소리와 물기 짓이기는 소리만 오갔다. 강다은은 침묵을 메우려는 듯 혼잣말을 이었다.

“여기 책 진짜 많다. 어, 근데 이건 무슨 책이야? 표지 없는 문고본인데.”

상자 맨 밑에서 얇은 책 한 권을 집어 올렸다. 표지는 떨어져 나갔고 속장도 누렇게 얼룩져 있었다. 책을 펼치자 책등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책갈피 한 장이 끼어 있었고, 오래된 종이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뭐야, 편지 아니야 이거?”

강다은은 책갈피를 집어 들었다. 낡은 크림색 종이가 얇게 접혀 봉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책갈피 끝에는 연필로 희미하게 '하늘'이라고 적혀 있었다. 봉투를 펼치려 하자 젖은 종이 한쪽이 부드럽게 찢어졌다.

“어, 젖었네.”

당황해서 손을 멈췄다. 안쪽으로 번진 푸른 잉크 자국이 비쳤다. 바깥 면은 물기가 배어 군데군데 반투명해져 있었고, 종이가 너무 약해져 펼치는 것만으로도 가장자리가 부스러졌다.

윤하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적혀 있어.”

차분했지만 호흡 사이 텀이 평소보다 짧았다. 강다은이 조심스럽게 빛에 비춰 보았다. 번진 글씨 사이로 몇몇 획만 남아 있었다.

“글자가 거의 다 지워졌어요. 말려서 봐야 할 것 같은데… 근데 이거, 이거—”

말끝을 흐리며 겉면을 뒤집었다. 희미한 글씨는 대부분 녹아내렸지만, 두 글자 정도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윤하늘의 손이 다가갔다. 손가락이 젖은 종이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 순간, 윤하늘은 손을 멈췄다.

필체였다. 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또박또박하지만 조금은 삐딱하게 올라가는 획의 끝. 고등학교 시절 내내 봐 왔던 연필 글씨체가 그 자리에 있었다. 강다은의 손에서 받아 쥐었다. 손끝이 가볍게 떨렸지만, 시선은 여전히 종이 위에 고정된 채였다.

서지헌이 걸레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윤하늘의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인상을 찌푸리는 정도였다. 그러나 책갈피의 연필 글씨를 확인하는 데는 2초도 걸리지 않았다.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무표정이 아니라, 굳어버린 것에 가까웠다.

몇 걸음 만에 손이 봉투를 향해 뻗어졌다. 윤하늘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며 팔을 접어 가슴 쪽으로 당겼다. 손아귀 안에 있었다.

“돌려주십시오.”

어느 때보다 딱딱한 목소리였다. 존댓말의 껍질이 너무 단단해서 오히려 떨림이 안에 감춰져 있다는 걸 온전히 드러냈다.

“이게 뭔지 아세요.”

질문의 형태가 아니었다. 서지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그 종이에 꽂혀 있었으며, 턱 선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오른손이 허공에서 움찔했지만, 더 이상 뻗지 못했다. 강다은이 두 사람 사이에서 한 걸음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저기, 그게… 혹시, 두 분이…”

“아니야.”

짧게 끊었다. 여전히 단단히 쥐고 있었다. 젖은 종이의 일부가 손바닥 온기에 밀려 말려 올라갔다. 속에 든 편지지의 희미한 줄무늬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서지헌의 호흡이 한 번 거칠어졌다. 입술을 열었지만 말을 찾지 못하는 듯 잠시 멈췄다. 변호사로서 늘 정제된 어휘로 상황을 통제하던 서지헌이, 단 한 마디조차 내뱉지 못했다. 이마에 얇은 땀이 배어 있었다.

강다은은 눈을 크게 떴다. 그쪽의 낯선 당혹감에 당황했지만, 그보다도 윤하늘의 옆모습에서 생경한 결기를 읽었다. 평소의 윤하늘이 아니었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물러난 걸레를 집어 들었다.

서지헌의 시선이 마침내 윤하늘의 눈을 향했다. 그 순간 얼굴 위로 당혹과 수치,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 한 걸음이 지하창고의 긴장을 최고조로 밀어 올렸다.

다음 순간 돌아서서 계단을 향했다.

구두 소리가 철제 계단을 두드렸다.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오히려 지나치게 절제된 속도로 올라갔다. 윤하늘은 그 뒷모습을 쳐다보지 않았다. 시선은 손에 든 것에 박혀 있었다.

“저기, 윤하늘 씨. 나 잠깐—”

강다은이 계단 쪽으로 발을 옮겼다.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내버려 둬.”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강다은은 멈칫했다. 몇 초간 계단 입구에서 망설이다가, 천천히 벽 쪽으로 물러섰다.

계단 위쪽에서 서점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처마 밖으로 빗소리가 다시 선명해졌다. 창고 안은 그 소리만이 남아 벽을 따라 흘렀다.

윤하늘은 내려다보았다. 젖은 종이 사이로 푸른 잉크의 희미한 획 하나가 스쳤다. 글자인지, 단지 번진 흔적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희미했다.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서 있자, 발밑으로 퍼지는 냉기가 계절의 습기와 뒤섞여 무거웠다. 창고 어딘가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다은은 그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제자리에 머물렀다.

빗소리는 여전히 지하 계단까지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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