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
9화
지하창고의 공기는 하룻밤 사이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습기가 콘크리트 벽을 타고 내려와 바닥의 골판지 상자들을 더 깊이 적시고 있었다. 윤하늘은 계단 입구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어젯밤 잠은 오지 않았다. 손으로 만졌던 편지 봉투의 감촉이 손바닥에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강다은이 먼저 계단을 내려왔다. 낡은 데님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낀 손에는 빈 플라스틱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언니, 이것부터?”
강다은이 형광등 불빛 아래서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윤하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 쪽으로 쌓인 상자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제 서지헌이 떠난 자리의 공허함이 아직 벽 근처에 감도는 듯했지만,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위쪽 상자부터. 아래쪽은 바닥이 다 젖었을 거야.”
두 사람은 말없이 작업을 시작했다. 강다은은 빠른 손놀림으로 상자들을 하나씩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 윤하늘은 상태를 분류해 바구니에 옮겼다. 절판본들의 종이 냄새가 습기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가끔 물방울이 환기구 근처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여기 상자, 완전히 망가졌네.”
강다은이 구석 쪽을 가리켰다. 바닥에 닿은 골판지가 축축하게 무너져 있었고, 그 밑으로 검은 곰팡이가 번져 있었다. 강다은은 무릎을 꿇고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추었다. 젖은 신문지와 함께 낡은 문고본 두 권이 나왔다. 그러고도 손을 더 넣어보다가, 갑자기 동작이 멎었다.
“어…… 언니.”
강다은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윤하늘은 손에 쥔 책을 내려놓고 그쪽을 바라봤다.
강다은의 손가락 사이로, 물에 젖어 반쯤 투명해진 종이 조각이 들려 있었다. 크기는 손바닥보다 작았다. 봉투의 일부가 찢겨 나간 듯한 모양이었고, 그 옆으로 접힌 채 눌어붙은 편지지 조각도 보였다.
“뭔데.”
윤하늘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다리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편지 봉투 조각이라는 걸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책갈피 사이에…… 아니, 책갈피 밑에 끼어 있었어. 상자 바닥에 붙어서.”
강다은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윤하늘 쪽으로 내밀었다. 윤하늘은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들이쉬었다. 손끝이 닿자 젖은 종이가 살짝 밀렸다. 너무 약해져서 힘을 주면 찢어질 것 같았다.
봉투 조각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찢긴 편지지 쪽에는 푸른 잉크로 쓴 글자 몇 개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환……미안……’
윤하늘은 손을 멈췄다. 눈이 글자 위에 고정되었다. 그다음 줄에는 더 희미한 획만이 이어져 있었다.
‘……돌아……’
필체. 그건 틀림없는 서지헌의 필체였다. 어제 지하창고에서 보았던 봉투의 그것과 같았다. 하지만 이 종이는 더 작고, 더 낡았고, 더 많이 젖어 있었다.
강다은이 불안한 듯 윤하늘의 옆얼굴을 살폈다.
“필체…… 변호사님 거 아니야, 언니?”
윤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든 종이 조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십 년 전, 밤새 써 내려갔던 자신의 편지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찢어버렸지만 잊지 못한 문장들. 그 마지막 문장과 지금 손에 든 글씨의 결이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닮음만으로 단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서지헌이 보여준 태도, 숨기려 했던 것들, 떠난 이유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그 사람을 생각하면, 한 조각의 편지만으로 모든 의심을 거둘 순 없었다.
오히려 더 경계해야 한다. 알 수 없는 의도가 있을지도 몰랐다.
윤하늘은 천천히 종이 조각을 접었다.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강다은에게 더 많은 걸 보여주게 될 것 같았다. 접은 조각을 조심스럽게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손끝에 물기가 남았다.
“다은아.”
강다은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윤하늘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숨을 쉬었다.
“이 얘기…… 그쪽에는 하지 마. 서지헌 씨한테.”
“하지만 이거, 변호사님이 쓴 거라면─”
“아니.”
윤하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더 단단했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랐지만, 이 순간에는 이걸 숨겨야 한다고 직감했다. 신뢰가 아니라, 아직은 정보의 주도권을 내줄 수 없다는 판단에 가까웠다.
“아직 말할 때가 아니야. 내가 정리되기 전에는.”
강다은은 입술을 달싹였다가 닫았다. 평소라면 몇 마디 더 보탰겠지만, 윤하늘의 옆모습이 평소보다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목에 걸린 헤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언니가 그렇게 말하면.”
주머니 속 종이 조각은 천에 스며든 물기 때문에 차갑게 느껴졌다. 대청소를 계속하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윤하늘은 빈 바구니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뒷모습은 더 이상의 대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강다은은 지하창고 안에 잠시 더 서 있었다. 꺼지지 않은 형광등이 깜빡였다. 쌓여 있던 상자들과 젖은 신문지, 그리고 어제 서지헌이 서 있던 빈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계단 입구로 걸어가, 계단 중간쯤에 앉아 무릎을 감쌌다.
빗소리는 여전했다. 지하까지 닿아 오는 빗소리가 계단통 안에서 작은 울림이 되어 맴돌았다.
강다은은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종이 조각을 건네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았던 희미한 글자 몇 획이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윤하늘의 표정에서 읽은 것은 충격보다도, 일말의 적의였다. 그러나 그 적의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무엇을 향한 것인지 그녀는 아직 헤아리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윤하늘이 편지 조각을 숨길 때 손이 바르게 떨렸다는 것만은 또렷이 기억했다.
윤하늘은 카운터 위에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다. 지하창고에서 올라온 지 십 분 정도 지났을까. 강다은은 계단 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의 표정을 한 번 더 살피고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서점 문이 열렸다. 빗소리가 한순간 커졌다가 다시 닫혔다.
서지헌은 접힌 검은 우산을 문 옆 통에 세워 넣고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는 변호사 서류 가방. 시선은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윤하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방을 카운터 위에 내려놓던 손끝이 짧게 지체됐다.
“표정이 안 좋습니다.”
윤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운터 위의 가방과 서지헌의 손을 번갈아 보더니, 천천히 턱을 치켜들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이번에도 침묵. 서지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장마의 습기로 흐트러진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안경 너머로 윤하늘의 굳은 입가를 한참 응시했다.
“댁이 신경 쓸 일 아니에요.”
윤하늘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서지헌의 시선이 잠시 움찔했으나 곧 정돈됐다. 손가락으로 가방 표면을 한 번 톡 두드렸다.
“공청회 서류입니다. 발언 등록 마감이 사흘 전이니 내일까지—”
“서류는 거기 두고 가세요. 볼게요.”
“의견서 초안도 첨부했습니다. 검토 후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알겠다고 했잖아요.”
서지헌의 입술이 얇게 다물렸다. 카운터 위에 올려진 가방을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두며 허리를 곧게 폈다. 두 사람 사이로 비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만 반복됐다.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하죠.”
서지헌은 가방 손잡이에서 손을 완전히 떼며 말을 이었다.
“서점 매각 건입니다. 제 의뢰인 측이 조건을 상향했습니다. 지난번 제시했던 금액보다 이천만 원을 더 얹겠다고 합니다.”
윤하늘의 왼손이 카운터 위에서 살짝 움찔거렸다. 엄지손가락이 검지 옆면을 한 번 눌렀다.
“이미 답했다고 생각하는데.”
“공청회 전에 결정하셔야 합니다. 공청회가 끝나면—”
“끝나면 뭐가 달라져요.”
서지헌은 잠시 말을 끊었다. 창밖을 한 번 응시한 뒤 다시 그녀를 향했다.
“공청회는 형식적 절차에 가깝습니다. 대부분의 주민 의견은 이미 취합되었고, 구청 측 방향도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서점은 감정평가액만 받고 수용됩니다. 지금 제안은 그보다 훨씬 나은 조건입니다.”
“수용되면 그만이죠.”
“윤하늘 씨.”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윤하늘의 어깨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이 건물은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지하 누수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발생했습니다. 근본적인 보강 공사 없이는 버틸 수 없습니다. 비용은 사천에서 오천만 원 이상 들 거고, 월 유지비도 현재 매출로는 감당하지 못할 수준입니다.”
서지헌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낮고 정확했다. 숫자를 읊을 때마다 손가락 하나씩 접었다. 윤하늘은 그 손을 바라봤다. 십 년 전과 똑같은 버릇이었다. 펜 대신 계산을 할 때면 저렇게 손가락을 접던 사람.
“이 서점은 팔려야 합니다. 팔지 않겠다면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셔야 하고요.”
숫자를 다 접고 난 손이 주먹을 쥐었다. 윤하늘은 그 주먹에서 시선을 떼며 짧은 숨을 골랐다.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거예요.”
서지헌의 눈썹이 움직였다.
“댁한테 이 서점이 뭔데 이렇게까지……”
윤하늘은 뒷말을 삼켰다. 카운터 가장자리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목소리가 한 톤 더 내려갔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여길 팔라고 하는 거죠.”
서점 안이 조용해졌다.
서지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등을 곧게 펴고 서 있었지만, 시선은 어딘가를 향해 겨누지 못한 채 허공에 멈춰 있었다. 이마에 배어 있던 얇은 땀이 형광등 아래서 반짝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윤하늘의 입술 사이로 말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쉽게 떠날 사람이 무슨 상관이에요.”
서지헌의 호흡이 멎었다.
순간 그의 얼굴 위로 모든 표정이 지워졌다. 안경 너머의 눈빛이 한 번 흔들리더니, 이내 어떤 읽을 수 없는 평평함으로 굳어졌다. 손에 쥔 것을 바라보는 듯했으나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다. 잠시 입술 사이로 무언가 떠오르는 듯했으나 곧 사라졌다.
카운터를 사이에 둔 정적이 한층 무거워졌다. 서지헌은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마치 무엇에 답하는 듯한 각도였다. 그리곤 다시 들었다.
“그렇다면.”
목소리는 변호사의 것이었다. 정확히 한 글자 한 글자 절단하는 존댓말.
“더 이상 제가 개입할 이유가 없겠군요.”
윤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이 카운터 위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서지헌은 서류 가방을 열어 서류 뭉치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렸다. 종이가 나무 표면에 닿는 소리만 선명했다. 가방을 닫고 잠금쇠를 채우는 동작 하나하나가 느렸다.
“공청회 의견서는 작성되어 있습니다. 검토하시고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마지막 한 장을 가지런히 정렬하는 손끝이 떨리지 않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허리를 숙여 목례하고는 몸을 돌렸다. 구두 소리가 마룻바닥을 세 번 울렸다. 문 옆 통에서 검은 우산을 뽑아 드는 손이 서두르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빗소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굵은 빗줄기가 출입구 바깥의 아스팔트를 두드리고 있었다. 서지헌은 우산을 펴지 않은 채 한 발짝 빗속으로 내디뎠다. 검은 양복 어깨에 짙은 물자국이 번졌다.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
윤하늘은 카운터에 손을 짚은 채 서 있었다. 창밖으로 검은 우산이 펴지는 순간과, 우산이 빗속으로 움직여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을 봤다. 빗발이 더 굵어져 가로등 불빛을 흩뜨렸다. 서점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그 적막은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카운터 위에 놓인 서류 뭉치의 맨 윗장을 덮은 비닐 커버에 형광등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왼손이 주머니 속의 편지 조각 위에서 천천히 말렸다 펴졌다.
밖에서는 장마가 더 거세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