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

11화

아침 여섯 시. 빗줄기는 밤새 가늘어졌다 굵어지길 반복했다. 윤하늘은 서점 카운터에 엎드려 잠에서 깼다.

어깨에 걸친 담요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창밖 거리는 여전히 젖어 있었고, 가로등 불빛 아래 빗방울이 바늘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 속 편지 조각을 만졌다.

네 조각. 「―지 마」「내가 돌아」「그날까지」「너」. 밤새 손에서 놓지 못했다.

서점 문이 열렸다. 우산도 없이 비옷만 걸친 최노인이었다. 어깨가 흠뻑 젖어 있었다.

“어르신, 이 시간에 어떻게…”

“말대꾸 말고.”

최노인은 평소보다 퉁명스러웠다. 구부러진 왼손 약지를 무릎에 대고 비틀며 좌우를 살폈다. 그 눈빛은 다급함과 무거움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그놈 있나. 서지헌이 말이여.”

“아직 안 오셨어요. 공청회 전에는…”

“됐다. 네가 받어.”

최노인이 비옷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연한 크림색 바탕에 갈색 잉크, 서점 옛 로고가 찍힌 봉투였다. 습기에 전혀 손상되지 않은 깨끗한 상태였다. 윤하늘의 손이 멈췄다.

“이건…”

“십 년 됐나. 그때 내가 봤어.”

최노인은 카운터 앞 의자에 앉았다. 빗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손을 내저으며 추가 질문을 막았다.

“그날 밤, 서지헌이 녀석이 이 서점에 왔어. 한밤중에. 책갈피 사이에 뭘 집어넣더라고. 나는 그때 이 가게서 일했잖나. 재고 정리하고 있었어.”

안경 너머 윤하늘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말릴라다가 말았어. 얼굴이 하얘서. 아버지가 망하고 나서 처음 본 얼굴이었어.”

윤하늘은 봉투를 집었다. 열지 못했다. 손끝이 떨렸다.

“그리고 이거.”

최노인이 봉투 밑에서 접힌 신문 조각을 꺼냈다. 십 년 전 지역 신문이었다. ‘S건설 대표 서모 씨 파산 신청… 가족 연대 보증으로 전 재산 처분 위기’라는 제목이 반쯤 접힌 채 드러나 있었다.

“읽었나?”

“며칠 전에… 알게 됐습니다.”

“그럼 이제 다 안 거네.”

최노인은 손을 무릎에 올렸다.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 녀석, 너한테 말 못 했을 거여. 자기 입으로 집안 망했다고 말할 놈이 아니거든. 그것도 니 앞에서는.”

윤하늘은 봉투를 열었다. 서지헌의 필체였다. 물에 젖지도, 찢어지지도 않은 편지지가 접혀 나왔다. 그녀가 가진 조각과 같은 종이였다. 편지지 상단의 첫 문장.

「윤하늘 선배에게.」

눈앞이 흐려졌다.

두 번째 문장.

「떠나기 전에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나는 돌아올 겁니다.」

세 번째 문장.

「그날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할 자격이 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 편지는 숨겨 둡니다. 선배가 언젠가, 혹시라도, 이 책을 펼친다면.」

네 번째 문장.

「가지 마, 라고 말해 주길 바란 게 아니라… 나는 선배를 기억할 거라는 뜻입니다.」

윤하늘은 손을 입에 가져갔다. 편지지가 바람에 떨렸다. 자신의 찢어버린 편지에는 이렇게 썼었다.

「가지 마」「나는 기다릴 거야」「그날까지」「너를」. 그녀는 떠나지 말라는 말을 하지 못했고, 그가 떠난 뒤에야 편지를 써서 찢어버렸다. 이 편지는 그녀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 아니었다. 그녀가 편지를 쓰기 전, 서지헌이 먼저 써서 숨겨둔 편지였다.

“가지 마라고…”

윤하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가 그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최노인은 일어섰다. 젖은 비옷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말없이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이제 그만 울고 가자. 공청회 시작 전에 갈 거 아녀.”

윤하늘은 편지지를 세 번 접어 가슴께로 가져갔다. 심장 위. 십 년 만에 도착한 편지가 거기 닿았다.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어르신.”

“와?”

“함께 가주십시오.”

최노인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라 했어도 니가 안 오믄 그냥 갈랬는데. 됐다, 빨리 나서.”

구청 공청회장 로비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복도 끝 긴 의자에 서류 봉투를 든 사람들이 몇 명 앉아 있었다. 벽시계는 공청회 시작 이십 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윤하늘은 로비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커피 자판기 앞이었다. 검은 정장 차림의 서지헌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서류 봉투를 쥐고, 다른 손은 커피 잔을 받쳐들고 있었다.

마시지 않았다. 그냥 들고만 있었다. 그의 옆모습은 어젯밤 극존댓말로 선을 긋던 그대로, 오늘 공청회를 끝내면 모든 업무가 종료된다고 통보하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윤하늘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가슴께에 품은 증거물이 단단히 접힌 채 느껴졌다. 편지와 봉투, 파산 기사 조각. 최노인이 그녀 옆에서 낮게 말했다.

“저기 있네.”

“네.”

“안 가고?”

“갑니다.”

윤하늘은 서지헌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그대로 두고 로비 반대편 통로로 발을 옮겼다. 청중석 입구는 그쪽이었다. 서지헌은 이쪽을 보지 않았다. 커피 잔을 든 손만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걸었다. 증거물을 품에 단단히 쥔 손끝이 하얘졌다. 눈물은 이미 닦았다.

이제는 말할 차례였다. 공청회장 안에서, 모든 사람 앞에서. 그의 편지와 그녀의 편지가 십 년 만에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장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빗소리가 복도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윤하늘의 표정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공청회장은 예상보다 붐볐다. 접이식 의자 여덟 줄이 빽빽하게 채워졌고, 뒤편에는 선 채로 팔짱을 낀 상인들도 있었다. 형광등 빛이 길게 뻗은 테이블 너머로 심의 위원 셋이 나란히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윤하늘은 청중석 가운데 줄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갰다. 주머니 안에는 편지 조각과 접은 파산 기사 스크랩이 들어 있었다. 재개발 찬성 측 발언이 길어지고 있었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도표를 들어 올리며 공실률과 유동 인구 감소를 수치로 읊는 동안, 뒤편에서 누군가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찬성 측 두 번째 발언자가 자리로 돌아가자, 사회를 보던 위원장이 고개를 들었다. “다음 발언 신청자. 최용호 님.”

최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검은 고무신이 마룻바닥을 끌며 소리를 냈다. 청중석 왼쪽 앞줄에 앉은 서지헌이 고개를 돌려 최노인을 바라봤다. 시선이 잠시 윤하늘 쪽으로 닿았다가 곧바로 발언대로 돌아갔다.

최노인이 마이크 앞에 섰다. 굽은 왼손 약지를 들어 안경을 한 번 밀어 올렸다. “최용홉니다.

장호상가 3번지, 최씨슈퍼 하는 사람이고.” 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노인은 주머니에서 한 움큼의 종이를 꺼냈다. 물에 젖어 가장자리가 일그러진 편지지, 낡은 신문 조각들. 발언대 위에 펼쳐진 종이들이 형광등을 받아 희뿌옇게 빛났다. 서지헌의 손이 서류 봉투를 움켜쥐었다.

“저 건물, 번지수만 말하면 4번지. 헌책방 하나 있다고 치읍시다. 근데 거기 주인 됐다는 아가씨가 며칠 전에 지하 창고를 치우다가 이런 걸 찾았는데요.” 최노인은 투명 비닐에 담긴 편지 조각을 집어 들었다. “‘내가 돌아올게.’ 이렇게 써 있네.”

술렁임이 청중석 앞줄에서 시작됐다. 서지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누가 썼는지 아직은 말 안 하겠소. 근데 이거랑 같이 나온 게 이겁니다.” 신문 조각이 펼쳐졌다. 십 년 전 지방 경제면의 파산 공고. 최노인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친 부분을 두드렸다. “여기 보면 아버지 빚 때문에 집이고 가게고 죄다 넘어갔어요. 스물한 살짜리한테. 통장도 묶이고 대학도 그만뒀다 안 했소? 그 집 아들.”

청중석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그 애가 짐 싸서 떠나는 날, 나는 그 꼴을 옆에서 다 봤소. 책 사이에 뭘 꽂아넣는 것도.

그때는 편진지 몰랐는데, 하여간 이렇게 써 넣었어요. 앞으로 올 거라고.” 서지헌은 굳은 자세로 발언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턱 선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도망간 게 아니고, 갚느라고 달아난 거요. 근데 그걸 아무도 몰라요. 받아야 할 사람도 편지가 없으니 몰랐고.” 최노인은 편지 조각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내가 이 자리에서 왜 이 말을 하느냐면, 그 집안 사정으로 건물 가치 재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서점은 서점으로 봐 달라고.”

위원장이 손을 들었다. “발언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최노인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발언대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청중석 뒤편에서 누군가 박수를 쳤다. 두세 명이 더 따라 쳤다.

서지헌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윤하늘을 보았다. 눈빛에 질문이 있었다. 그녀가 이미 알고 있었는지를 묻고 있었다.

윤하늘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주머니에서 편지 조각이 담긴 봉투를 꺼내 가슴께에 대고, 짧게 한 번 두드렸다. 서지헌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발언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 채 그녀를 주시했다.

“반대 측 추가 발언, 윤하늘입니다.” 마이크를 잡은 손이 차가웠다. 그녀는 편지 조각을 발언대 위에 올려놓았다. “방금 최용호 님께서 보여주신 편지입니다. 저희 서점 지하창고에서 나왔고요. 네 조각이 남았습니다.” 그녀는 각 조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읽었다. “‘―지 마.’ ‘내가 돌아.’ ‘그날까지.’ ‘너.’”

청중석이 조용해졌다.

“이 편지는 십 년 전에 쓰였습니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보내려고 책갈피 사이에 꽂아두었으나, 발송되지 못했습니다. 보내는 사람은 떠나야 했고, 받을 사람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윤하늘은 손을 내려 편지 조각 위에 가지런히 얹었다. “저는 그 편지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공청회장 안이 한순간 숨을 멈췄다. 서지헌의 손에서 서류 봉투가 떨어지려는 듯 기울었다. “십 년 동안, 저는 이 편지의 문장과 거의 같은 문장을 제가 썼다고 기억해 왔습니다.

제가 밤새 써서 찢어버린 편지에 적은 말이라고. 그런데 며칠 전에 알게 됐습니다. 이건 답장이라는 걸.”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편지를 내려다봤다. “서점은 저와 삼촌만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보내지 못한 말들이 책갈피 사이에, 지하 창고의 상자 밑에, 습기에 젖은 벽지 틈에 묻혀 있습니다. 이 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그 건물이 헐리면, 종이만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뒤편에 서 있던 약국 주인이 팔짱을 풀었다. 인쇄소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 편지를 쓴 사람이 왜 떠나야 했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게 집안의 일이었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사람이 십 년 후 변호사가 되어 이 서점을 지키려고 돌아왔다는 것도.”

서지헌이 일어났다. 서류 봉투가 의자 위에 떨어졌다. 위원장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발언대에 오르셔도 됩니다.” 그는 잠시 굳어 있다가, 천천히 걸어왔다.

윤하늘은 마이크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두 사람의 거리는 한 뼘쯤이었다.

서지헌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져 있었다. “서지헌입니다.

공청회 답변서 제출자로 오늘 이 자리에 왔습니다. 십 년 전, 저는 아버지의 파산으로 대학을 그만두고 이 도시를 떠났습니다. 편지를 썼습니다.

책 사이에 넣었습니다. 보낼 수 없었습니다. 돈을 갚기 전까지는 돌아올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발언대 위의 편지 조각을 내려다봤다. 손끝이 조각 근처로 다가갔다가 멈췄다. “그동안 제가 돌아오지 못한 것은, 달아나서가 아니라 갚느라였습니다. 하지만 그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은, 제가 도망친 게 맞습니다. 설명으로부터.”

서지헌은 고개를 들어 위원들을 똑바로 바라봤다. “오늘 답변서에는 법적 근거와 절판본 목록만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정에 대해서는 한 줄도 적지 않았습니다. 감추려 한 게 아니라, 증거로 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청중석의 최노인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지금 이 서점 앞에서 장사를 접고 떠난 가게들의 목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 이 상가에서 문을 닫은 곳이 열한 곳. 그 가운데 아홉 곳은 지난 십 년 안에 임대를 시작한 신규 점포였습니다. 오래된 곳 몇이 이 거리를 떠받쳐 왔는지, 그중 하나가 바로 저 서점입니다.” 인쇄소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맞는 말이야! 우리도 십 년 넘었는데 임대료 올려서 다 나가고…” 위원장이 손을 들자, 서지헌은 윤하늘을 향해 돌아섰다. 눈빛에 더 이상 회피는 없었다.

“편지의 끝문장은 이랬습니다. ‘그날까지 너를.’” 그는 편지 조각을 가리켰다. “‘너’ 다음에 뭐라고 적으려 했는지, 저는 아직 완성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서점을 지키겠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개인의 공간이 아니라, 십 년 만에야 닿은 편지가 증거가 되는 장소입니다.”

청중석 뒤편에서 손뼉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번엔 제법 많은 이들이 따라서 쳤다. 약국 주인, 인쇄소 사장, 평소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던 옷가게 주인까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원장이 손을 들어 정리를 요청했다. “양측 발언을 충분히 들었습니다. 추가 질의 없이 마무리하겠습니다.” 심의 위원 둘이 서로에게 몸을 기울여 잠시 속삭였다.

가운데 앉은 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 심의회는 청취한 내용을 종합하여, 해당 건물의 마을 자산 보존 가치를 별도 안건으로 검토할 것을 제안합니다. 정비계획 구역 내 빈 가게 문제와 연계한 대안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서지헌은 발언대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윤하늘은 바닥에 떨어진 접수증을 주워 그에게 건넸다. 그가 받는 손끝이 그녀의 손가락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녀가 낮게 말했다. 서지헌은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숙였다. 눈가에 붉은 기가 얇게 번져 있었다.

청중석이 하나둘 일어섰다. 최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르신, 저 서점 편지 그거 진짭니까.” 최노인의 사투리가 짧게 튀었다. “내가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이간.”

윤하늘과 서지헌은 청중석 앞에 나란히 섰다. 그녀는 편지 조각을 꺼내 조심스럽게 접어 봉투에 다시 넣었다. 서지헌이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보관하실 겁니까.” “네. 당분간은.”

그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공청회 결과는 다음 주 중으로 통보된다고 합니다.” “네. 들었어요.”

청중석 뒤편에서 상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지헌은 떨어진 서류 봉투를 집어 들고 흩어진 종이들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의 손동작은 정확하고 빨랐다.

“서점으로 가시겠습니까.” 갑자기 건네진 물음에 윤하늘은 잠시 멈칫했다. “같이 가자는 말씀이세요.” “네.” 한 글자. 짧고 단단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발언대 쪽을 한 번 더 돌아봤다. 위원들은 이미 퇴장하고 있었고, 마이크도 꺼져 있었다. “네. 가죠.”

두 사람은 공청회장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복도 끝 창문 너머로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건물 현관을 나서자 젖은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윤하늘이 우산을 펴려는 손을 멈추고 윤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 사이로 옅은 햇살 한 줄기가 샜다가 사라졌다. “비가 잦아들고 있어요.” 서지헌도 윤하늘을 보았다.

“예. 그렇군요.” 그는 우산을 접어 손에 쥐었다.

보도블록 틈마다 빗물이 고여 있었고, 빈 가게들의 셔터에는 물방울이 매달려 반짝였다. 서점 간판이 저 멀리 보였다. ‘오래된 서점’이라는 글씨가 빗물에 씻겨 선명했다.

서지헌은 걷다 말고 간판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 편지에 대해서. 서점에 도착하면…

시간이 되시면. 조금.” “네.” 윤하늘이 받았다. “저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서지헌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입가에 아주 옅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랑비는 점점 옅어졌다. 장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희미한 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 길게 늘어진 두 개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11화